독서

너를 사랑한다는 건 -알랭드보통

러브블로썸 2024. 10. 17. 14:37

알랭드보통의 사랑시리즈 중 하나인 

 

너를 사랑한다는 건 

 

원작은 키스하기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kiss & tell)로 소개되었던 작품

줄거리 

책의 주인공은 애인에게 차이며 "공감할 줄 모른다"라는 비난을 받는다. 공감 이전에 앎과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주인공은 누군가를 이해할수 있는 방법으로 전기쓰기를 택한다. 이사벨이라는 평범한 여자친구에 대해서 전기쓰기의 방식으로 접근해 나간다. 즉, '누군가를 아는것,'과 '사랑하는 것' 과 맞물려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녀의 어린시절, 가족, 남자관계 등을 알아가며 계속적인 질문을 해 나간다. 하지만 이러한 이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말미에 주인공은 다시한번 더 이별을 겪게 된다. 

 

내가 왜 한번도 머리를 올리지 않느냐고 묻자, 그녀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답을 내놓았다. "나도 왜 내가 머리를 올리지 않는지 모르겠어, 어쩌면 올려야 할지도 몰라. 하지만 나는 안 그래. 나도 이유를 몰라. 그건 내가 왜 치즈를 정육면체로 자르지..왜 나는 화장실에서 뭘 못 읽는지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야. 나한테는 나도 이해 못하는게 많아. 솔직히 말하면 이해하고 싶지 않은것도 많고, 왜 너한테는 모든게 그렇게 분명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마치 사람들의 삶이 그 말도 안되는 전기안에 요약 정리 될 수 있기라도 한 것 처럼 말야.... 사실 우리도 그만 만나야 할 것 같아."

 

 

 

감상평 

누군가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방식을 자서전을 쓰는 방식과 결부시켜 글을 써내려간 작가의 생각에 감탄했다.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하고 공감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직접 경험의 부재로 완전한 공감은 불가능 한 듯 하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것을 직접 경험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비슷한 상황에서 느낄 만한 것을 생각하여 그들이 영향을 받는 방식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오직 상상에 의해서만 그가 느끼는 고통에 대한 개념을 형성할 수 있을 뿐이다. "

오래 함께 지낸 이도 한마디로 명료하게 정의내릴 수 없다. 앎의 축적이 오히려 명료함을 무너뜨린다. 그리고 나의 입장에 따라 같은 상대도 다르게 정의 내릴 수 있다. 각자 삶에 정의 내리는 런던이 얼마나 다양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본다면, 이해와 공감의 차원은 완벽히 도달하기가 어렵다. 그런의미에서 사랑은 어렵다. 요즘 흔히들 말하는 공감은 어렵지만 "차이를 존중해요."라는 말은 이 책을 빗대어 본다면 완전히 알지 못하는것에 대한 존중은 있을 수 없다는 점에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달달한 사랑 이야기는 아니다. 사랑에 대해 이토록 철학적으로 고찰할 수 있나 싶을 정도며 현실적인 소설이다. 누군가에 대한 이해의 바탕이 필요한 시기라면 이 책을 읽어볼 것을 권한다. 

 

 

책속의 한줄

초기의 데이트

p54 사실 우리의 인물 묘사의 명료함을 망치는 것은 무지가 아니라 지식의 축적이다. 함께 보낸 시간이 길수록 우리의 도식이 흐릿해져, 우리가 25년동안 알았던 남자나 여자를 하나의 깔끔한 전체로 응집시켜 표현하지 못하겠다고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다른 사람들도 사실은 우리만큼이나 복잡하고 알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암묵적으로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안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대게 그런 것을 깊이 생각할 인내심, [또는 더 친절하게 말하자면] 에너지가 없다

 

사적인것

p 154 사생활은 친절한 마음 또는 동정심을 갖고 보아야 하는 면이 담겨 있다. 사생활은 우리의 노출된 순간의 기록이다. 따라서 친밀해지는 과정에는 유혹과 대립되는 면이 있다. 비우호적인 판단을 받을 가능성이 높은, 사랑할 만한 가치가 없어 보일 수도 있는 측면을 드러내는 위험을 무릅쓰기 때문이다. 유혹이 가장 훌륭한 자질과 야회복의 과시에 기초를 둔 것이라면, 친밀성은 상처받기 쉬운 면과 발톱을 모두 드러내는 간단치 않은 과정을 수반한다. 

 

 

p174 사랑의 전선에서 어느 편에 서 있느냐에 따라 똑같은 점을 두가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읽게 된 것이다.

감정생활에서만큼 사람을 터무니없이 오해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이것은 사랑에 빠졌을 때만큼 상대의 성향에 몰두하는 경우가 없기 때문이며, 그때만큼 상대의 불편한 악습들을 그렇게 열심히 잊으려 하는 경우가 없기 떄문이다. 사랑에 빠진 상태란 사람을 잘못 아는 것이 무엇인지, 엉터리 전기를 쓰는 것이 무엇인지 잘 보여주는 교묘한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p177 만일 이사벨이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지 않았다면 문제는 생기지 않았고, 앤드루는 그녀에게 계속 만족감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마치 고요한 휴양지에서 목가적인 로맨스가 생겼지만 그곳을 떠나자마자 관계가 엉클어지는 것과 같았다. 우리가 심리학을 동원하여 설명하곤 하는 두 사람의 화합 가능성은 결국 환경을 끌어들일 때 더 잘 이해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떤 장소가 안정된 느낌을 준다는 것은 거기 있는 사람들의 몇 가지 면만 드러난다는 것이다. 드러나는 면이 너무 적어 상대는 그에게 다른 면들은 없다는 그릇된 인상을 받을 수도 있다.

 

다른사람의 눈을 통해 본 세상 

p 197 공감의 핵심은 다른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능력이라고 한다. 이 행성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길은 비뚤어진 시각 때문에 대체로 왜곡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운이 좋고 민첩하면 다른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특권을 누릴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적어도 잠시라도 우리의 상대성을 넘어설 수 있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p202 이것은 사람이 필요한 경우 자기 내부의 지도를 얼마나 개인적인 색깔로 칠해버리는지 보여주는 교훈일 뿐 아니라, 이런 개인적인 색깔이 상대방과의 대화 속에 잠복하고 있을 수도 있다다는 것을 보여주는 교훈이기도 했다. 이사벨과 나는 지도상에서 두 도시를 각자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찾으려 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도 못한 채 밤새 아테네와 런던 이야기를 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즉, 물질적으로 말해서 런던은 하나밖에 없지만, 동시에 런던 사람만큼이나 많은 런던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p209 이런 차이들은 그냥 우연적인 것으로 치부해버릴 수도 있겠지만, 사람들이 상황을 다양하게 해석하고, 그런 뒤에 해석보다는 상황을 놓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는 방식을 증후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이성적'이라는 말을 예로 들어보자. 이 말은 이사벨의 사전에서는 이런 뜻이고 내 사전에서는 저런 뜻이기 때문에, 내가 그녀를 매우 '이성적'이라고 칭찬하면 그녀는 그 말이 욕이 아닌가 의심한다. ....

 

p221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늘 유동적이며, 이전 자아의 유물이 나중에 온 자아의 질서정연한 가정들을 방해한다. 자기 연민을 버리겠다는 이사벨의 결정은 침대에서 "시칠리아의 과부처럼 흐느끼게" 만드는 말다툼 뒤에 무너질 수도 있다. 

 

 

남자와 여자

p232 존슨은 사람들이 서로 다르지만 그럼에도 똑같은 단일한 가족에 속해 있으며, 따라서 인간 공동체로 가는 여권을 기초로 서로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나는 당신의 동기를 이해할 수 있다. 내가 내 베개 밑에서 비슷한 동기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자신 안에서 똑같은 경험을 발견하여 당신의 경험의 일부를 이해할 수 있다. ...

그러나 이런 베개를 이용한 이해 방식에는 더 어두운 암시가 깔려 있다. 베개 밑에 아무것도 없으면 어쩔 것인가? ....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것을 직접 경험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비슷한 상황에서 느낄 만한 것을 생각하여 그들이 영향을 받는 방식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오직 상상에 의해서만 그가 느끼는 고통에 대한 개념을 형성할 수 있을 뿐이다. "

상상으로 남들과 함꼐 고통을 겪는 것의 미덕에도 불구하고, 베개 이론의 우울한 전제는 남들의 경험을 진정으로 상상하려면 충분한 경험이 축적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축적된 경험만으로는 절대 우리 자신을 넘어선 곳에서 만나는 감정들에 적절히 대응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전제는 우울할 수밖에 없다. 

 

 

결말을 찾아서 

p 316 굳이 가서 확인할 필요도 없이, 어떤 사람이 어떤 것에 어떻게 반응할지 정확하게 아는것. 이것이 어떤 사람을 충분히 잘 안다는 완벽한 상징 아닐까?

 

후기

p327 이사벨의 정신 기능 가운데는 공감이라는 수준에서 이해하는 것을 포기하고, 그냥 우리의 차이를 존중하자는 슬픈 결정으로 만족해야 하는 영역들이 있었다. 왜 슬프냐고? 차이를 존중한다고 으스대며 말하는 것은 사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것, 따라서 솔직히 말하면 논리적으로 존중할 수 없는 것을 존중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파악하지도 못하는 것의 가치를 어떻게 존중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심리적으로 이해 못하는 것 외에도, 사실의 수준에서 내가 절대 알 수 없는 잡다한 것들이 있었다.